The Case of the Perforated Sheet - 주판치치
Salman Rushdie의 Midnight’s Children: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인도로 돌아온 남주인공은 지주의 딸을 검사하게 되었다. 의사가 지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지주는 의사에게, 그의 딸이 매우 정숙한 여인이기에 의사에게 몸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젊은 의사는 두 여성이 하얀 장막을 들고 서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천 중앙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 뚫린 구멍만을 통해서 의사가 지주의 딸을 검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젊은 의사는 3년동안의 진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젊은 의사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3년동안 지주의 딸은 상당한 수의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병들을 앓았는데, 젊은 의사의 방문은 거의 매주 이뤄졌다. 만날 때마다 의사는 천에 뚫린 구멍으로 젊은 여성의 몸을 볼 수가 있었다. 젊은 의사는 지주의 딸을 향해 아주 강력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이 의사는 이 여성의 몸을 부분에서 부분으로(partes extra partes) 알(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의사에게 허락된 부분들은 점점 더 우아해졌다(??). 확실히 의사가 지주의 딸을 욕망하는 것은 알겠지만 사랑은 어떠한가? 의사가 마지막으로 진찰한 부분은 지주의 엉덩이였다. 의사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을 때, 그는 엉덩이가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것을 봤다.” “수줍지만 고분고분한 홍조였다.” 지주 딸의 엉덩이가 홍조를 띈 것이다. 이때 이 젊은 의사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엉덩이가 당신을 향해 윙크를 한다면, 말하자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쳐다보고 있던 대상이 갑자기 당신을 보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부정할 수 없는 주체화의 효과를 만든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저 도망가든가 재주체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캉의 성차 공식의 남성 부분을(왼쪽) 묘사하는 예인데, 이는 욕망의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욕망의 대상이 구성될 때 모순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 모순이란 “전체(all)”와 “예외(exception)”의 모순이다. 이 모순이란 두 가지 명제에 따라 이뤄지는데: 1) 어떤 존재x는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존재x가 있다는 것이다. 2) 모든 존재x는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는다. 이 모순이 라캉이 “전체”가 왜 “예외”와의 관계로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전체에 예외는 덤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예외가 전체에 추가로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가 하나의 set가 되기 위해 감해지는 무엇이다. 이 예외가 전체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더하기 하나인 것도 아니다. 대신 빼기 하나이며, 하나-덜(One-less)이다. 다시 말해 이 예외란 천에 뚫린 구멍이다. 이 구멍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말인 즉, 이 구멍, 예외는 전체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리 제거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 구멍을 통해서 보는 것이 전체가 아니라 실제의 파편 정도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전체란 라캉의 성차 공식에서 모든 것을 감싸는 전체성의 전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all that appears through the hole, which opens up with the One-less of the exception, is worthy of desire.” (예외의 하나-덜과 함께 열리게 되는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욕망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전체성(totality)이란 동시에 모든 것을 포함한다거나 모든 것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 아닌, 연속으로 이뤄지는 전체성으로 봐야 한다. 라캉이 남자가 다른 성에 다가갈 때 하나에서 하나로(one by one, une par une)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한 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연속적 접근이 “여성(대문자 W)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여성은 비전체(not-all, pas toute)”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이는 남성의 위치를 지배하는 욕망의 논리(logic of desire)에 내재되어 있다. 끝이 없고 열린 연속이 전체라는 인식과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환유의 논리(logic of metonymy)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이 환유의 논리가 라캉 성차 공식 왼쪽의 “전체”를 구성한다.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전체”가 욕망적이라고 해도 그건 절대로 전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연속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항상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는 무한성이 “나쁜 무한성”이듯이 이 set의 개방성은 거짓이다. 이 연속의 개방성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말하는 개방성과 동일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돈 한 푼도 쓰지 않는한, 너희들의 근무환경 개선에 대한 모든 의견에 개방적이다(의견을 다 받을 것이다).” 즉 이 개방성이라는 건 조건부 개방성이라는 것이다. 배제를 통해 작동되는 개방성. 우리가 공식의 왼쪽에서 보는 전체성이란 이렇게 “제공된 것(provided)”이다.
그렇다면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을 욕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외에 대한 제도가(법의 작용) 전체의 set을 예외화(exceptionalize)하기 때문이다.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것이 예외적으로 보이거나 매우 특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정확히 왜, “모든 것들이 동일”하지만(그들은 모두 동일한 기능을 충족한다) 각각의 것이 특별한 이유이다. 어느 정도 모두가 동일한 조건을 충족하지만, 각각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이것이 왜 여성이 그 유명한 “너는 매우 특별해”라는 말에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그저 “이 연속성의 자격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식 왼쪽편에 관련된 보편성이나 전체는 모두 조건부 보편성이다. 이는 어느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이 전체성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바디우의 “성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바디우는 법의 근본적인 성격이 항상 “특별성”이나 “예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법의 보편은 항상 하나의 특정한(혹은 특정화된) 보편이다. 이를 통해 바디우는 보편적 단일성(singularite universelle)과 이 특정한 보편을 대립시킨다.
바디우는 살과 정신(flesh-spirit) 쌍을 몸과 영혼(body-soul) 쌍에 의해 구성된 개념적 영역으로부터 추출한다. 이 몸-영혼 쌍(모든 내포들과 함께)은 죽음-삶(death-life) 쌍과 연결된다. 삶-죽음 쌍은 생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항상 함께 존재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분리를 뜻한다.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는 “법 이전”의 상태를 주체가 결백했던 환상적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주체는 아직 법에 무지하다. 주체의 삶은 아직 삶의 길에 대한 실제를 구성하는 삶이 아니다. 즉 분리된 주체가 아니다. 이 삶은 바로 완전한 주체로 여겨지는 삶이다. 이러한 결백한 삶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이와 달리, 죄는 법 없이 죽었다. 이는 “법 이전”에 죽음의 길 자체가 죽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법이 끼어드는 것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법은 욕망에게 대상을 부여한다. 그리고 욕망은 결정(한정, determination)과 자율성을 위반적 욕망으로 찾게 된다. 법은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욕망을 그 욕망 대상에 연결한다. 주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율성과 함께 욕망은 자동성을 찾는다. 법은 욕망에게 삶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주체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다. “법과 함께, 이미 죽은 죽음의 길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법은 죽음을 삶으로 만들고, 영혼을 삶과 연결하는 것으로, 주체는 죽음의 쪽에 놓이게 된다. 법은 삶을 죽음의 길에 분배하고 죽음을 삶의 길에 분배한다.”
사도 바울은 자율성으로서, 그리고 자동성으로서, 욕망의 삶을 죄라고 불렀다. “If I do what I do not want, it is no longer I that do it, but sin which dwells within me.”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만약에 한다면, 그것을 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죄가 한 것이다.” 욕망의 존재가 단순히 분리된 주체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과 법에 대한 끼어듦은 주체의 외심성을 만들어낸다. (법이 주체의 중심을 만들어 내고 그 중심을 주체가 닿지 못하는 곳에 만든다.)
The Case of the Perforated Sheet - 주판치치
Salman Rushdie의 Midnight’s Children: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인도로 돌아온 남주인공은 지주의 딸을 검사하게 되었다. 의사가 지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지주는 의사에게, 그의 딸이 매우 정숙한 여인이기에 의사에게 몸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젊은 의사는 두 여성이 하얀 장막을 들고 서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천 중앙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 뚫린 구멍만을 통해서 의사가 지주의 딸을 검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젊은 의사는 3년동안의 진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젊은 의사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3년동안 지주의 딸은 상당한 수의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병들을 앓았는데, 젊은 의사의 방문은 거의 매주 이뤄졌다. 만날 때마다 의사는 천에 뚫린 구멍으로 젊은 여성의 몸을 볼 수가 있었다. 젊은 의사는 지주의 딸을 향해 아주 강력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이 의사는 이 여성의 몸을 부분에서 부분으로(partes extra partes) 알(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의사에게 허락된 부분들은 점점 더 우아해졌다(??). 확실히 의사가 지주의 딸을 욕망하는 것은 알겠지만 사랑은 어떠한가? 의사가 마지막으로 진찰한 부분은 지주의 엉덩이였다. 의사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만졌을 때, 그는 엉덩이가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것을 봤다.” “수줍지만 고분고분한 홍조였다.” 지주 딸의 엉덩이가 홍조를 띈 것이다. 이때 이 젊은 의사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엉덩이가 당신을 향해 윙크를 한다면, 말하자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쳐다보고 있던 대상이 갑자기 당신을 보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부정할 수 없는 주체화의 효과를 만든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저 도망가든가 재주체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캉의 성차 공식의 남성 부분을(왼쪽) 묘사하는 예인데, 이는 욕망의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욕망의 대상이 구성될 때 모순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 모순이란 “전체(all)”와 “예외(exception)”의 모순이다. 이 모순이란 두 가지 명제에 따라 이뤄지는데: 1) 어떤 존재x는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존재x가 있다는 것이다. 2) 모든 존재x는 거세 기능x에 영향을 받는다. 이 모순이 라캉이 “전체”가 왜 “예외”와의 관계로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전체에 예외는 덤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예외가 전체에 추가로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가 하나의 set가 되기 위해 감해지는 무엇이다. 이 예외가 전체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더하기 하나인 것도 아니다. 대신 빼기 하나이며, 하나-덜(One-less)이다. 다시 말해 이 예외란 천에 뚫린 구멍이다. 이 구멍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말인 즉, 이 구멍, 예외는 전체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리 제거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 구멍을 통해서 보는 것이 전체가 아니라 실제의 파편 정도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전체란 라캉의 성차 공식에서 모든 것을 감싸는 전체성의 전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all that appears through the hole, which opens up with the One-less of the exception, is worthy of desire.” (예외의 하나-덜과 함께 열리게 되는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욕망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전체성(totality)이란 동시에 모든 것을 포함한다거나 모든 것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 아닌, 연속으로 이뤄지는 전체성으로 봐야 한다. 라캉이 남자가 다른 성에 다가갈 때 하나에서 하나로(one by one, une par une)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한 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연속적 접근이 “여성(대문자 W)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여성은 비전체(not-all, pas toute)”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이는 남성의 위치를 지배하는 욕망의 논리(logic of desire)에 내재되어 있다. 끝이 없고 열린 연속이 전체라는 인식과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환유의 논리(logic of metonymy)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이 환유의 논리가 라캉 성차 공식 왼쪽의 “전체”를 구성한다.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전체”가 욕망적이라고 해도 그건 절대로 전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연속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항상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는 무한성이 “나쁜 무한성”이듯이 이 set의 개방성은 거짓이다. 이 연속의 개방성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말하는 개방성과 동일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돈 한 푼도 쓰지 않는한, 너희들의 근무환경 개선에 대한 모든 의견에 개방적이다(의견을 다 받을 것이다).” 즉 이 개방성이라는 건 조건부 개방성이라는 것이다. 배제를 통해 작동되는 개방성. 우리가 공식의 왼쪽에서 보는 전체성이란 이렇게 “제공된 것(provided)”이다.
그렇다면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을 욕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외에 대한 제도가(법의 작용) 전체의 set을 예외화(exceptionalize)하기 때문이다. 구멍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것이 예외적으로 보이거나 매우 특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정확히 왜, “모든 것들이 동일”하지만(그들은 모두 동일한 기능을 충족한다) 각각의 것이 특별한 이유이다. 어느 정도 모두가 동일한 조건을 충족하지만, 각각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이것이 왜 여성이 그 유명한 “너는 매우 특별해”라는 말에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그저 “이 연속성의 자격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식 왼쪽편에 관련된 보편성이나 전체는 모두 조건부 보편성이다. 이는 어느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이 전체성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바디우의 “성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바디우는 법의 근본적인 성격이 항상 “특별성”이나 “예외”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법의 보편은 항상 하나의 특정한(혹은 특정화된) 보편이다. 이를 통해 바디우는 보편적 단일성(singularite universelle)과 이 특정한 보편을 대립시킨다.
바디우는 살과 정신(flesh-spirit) 쌍을 몸과 영혼(body-soul) 쌍에 의해 구성된 개념적 영역으로부터 추출한다. 이 몸-영혼 쌍(모든 내포들과 함께)은 죽음-삶(death-life) 쌍과 연결된다. 삶-죽음 쌍은 생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항상 함께 존재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분리를 뜻한다.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는 “법 이전”의 상태를 주체가 결백했던 환상적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주체는 아직 법에 무지하다. 주체의 삶은 아직 삶의 길에 대한 실제를 구성하는 삶이 아니다. 즉 분리된 주체가 아니다. 이 삶은 바로 완전한 주체로 여겨지는 삶이다. 이러한 결백한 삶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이와 달리, 죄는 법 없이 죽었다. 이는 “법 이전”에 죽음의 길 자체가 죽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법이 끼어드는 것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법은 욕망에게 대상을 부여한다. 그리고 욕망은 결정(한정, determination)과 자율성을 위반적 욕망으로 찾게 된다. 법은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욕망을 그 욕망 대상에 연결한다. 주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율성과 함께 욕망은 자동성을 찾는다. 법은 욕망에게 삶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주체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다. “법과 함께, 이미 죽은 죽음의 길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법은 죽음을 삶으로 만들고, 영혼을 삶과 연결하는 것으로, 주체는 죽음의 쪽에 놓이게 된다. 법은 삶을 죽음의 길에 분배하고 죽음을 삶의 길에 분배한다.”
사도 바울은 자율성으로서, 그리고 자동성으로서, 욕망의 삶을 죄라고 불렀다. “If I do what I do not want, it is no longer I that do it, but sin which dwells within me.”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만약에 한다면, 그것을 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죄가 한 것이다.” 욕망의 존재가 단순히 분리된 주체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과 법에 대한 끼어듦은 주체의 외심성을 만들어낸다. (법이 주체의 중심을 만들어 내고 그 중심을 주체가 닿지 못하는 곳에 만든다.)
Notes:
-
hautepussy reblogged this from evilrobin
-
evilrobin posted this